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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구야담][14th]왜란을 예견한 류거사(劫倭僧柳居士明識)

  류거사는 안동 사람으로, 서애 류성룡의 숙부였다. 생김새가 보잘 것 없고 행동거지마저 어리석고 실속이 없었으며, 평소에는 말하지도 않고 웃지도 않았다. 류거사는 초가집을 하나 지어서 문을 닫고 혼자 책만 읽어서, 류성룡은 삼촌이 그냥 멍청한 줄 알았다. 그러던 중 하루는 류거사가 류성룡에게 말했다. [자네, 나와 바둑이나 두면서 놀지 않겠나?] 류성룡은 바둑의 고수였다. 게다가 그 전까지 숙부의 어리석은 모습만 보아 왔지 바둑 두는 것은 본 적이 없었기에 의아해하며 대답했다. [숙부님도 바둑을 두실 줄 아십니까?] 그리하여 두 사람은 바둑을 두게 되었다. 그런데 당대 조선의 국수였던 류성룡이 내리 3판을 숙부에게 내주고 말았다. 류성룡이 깜짝 놀라 의아해 하는데 류거사가 말했다. [이제 바둑은 그만 두세. 오늘 저녁 어떤 중이 분명 자네 집을 찾아올걸세. 그 중을 만나면 내 집으로 오라고 말하게나.] 류성룡은 마음 속으로는 숙부의 말을 이상하게 여겼으나, 겉으로는 [예, 알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 날 밤, 과연 어떤 중이 류성룡의 집에 와서 말했다. [저는 묘향산에서 온 중입니다. 오늘 이 집에서 하룻밤을 묵어갈 수 있을런지요?] 류성룡은 평소 멍청하던 숙부의 말이 들어맞은 것에 신기해하며 중에게 저녁을 먹이고 숙부의 집으로 보냈다. 류거사가 말했다. [나는 그대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소.] 중의 안색이 변하면서 물었다. [그것을 어찌 아셨습니까?] 류거사가 말했다. [조금 전 내 조카집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지요. 반드시 이 조용한 곳에 와서 잘 것이라 생각했소.] 말을 마친 뒤 류거사는 다른 말 없이 코를 골면서 잠을 자는 척을 했다. 그러자 중 역시 잠에 들었다. 중이 잠든 틈을 타서, 잠든 척하던 류거사는 몰래 중의 바리 주머니를 열어 보았다. 그랬더니 그 안에는 우리나라 지도 한 장이 있었다. 지도 곳곳에 관문, 성, 관청의 위치, 험한 곳, 우리나라의 주요 인물 등에 관한 것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또 바리 안에는 단검...

[청구야담][13th]가난한 선비와 선전관 유진항(赦窮儒柳統使受報)

  통제사 유진항은 젊었을 때 선전관이어서 대궐에서 숙직했다. 그 해는 1762년 영조 대왕 때로 금주령이 내려 엄하게 지켜지던 때였다. 어느날 한밤 중에 임금님이 갑자기 숙직 중인 선전관은 궁으로 들어오라는 명을 내리셨다. 마침 숙직 중이던 유진항이 명령을 받들어 궁으로 들어가니 임금님이 긴 검 하나를 주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소문을 들었더니 아직도 백성들이 몰래 술을 빚어 먹는다더구나. 너는 이 검을 가지고 가서 3일 내로 술을 빚는 사람을 잡아들이도록 하거라. 만약 술 빚는 사람을 잡아오지 못하면 네 목을 벨 것이다.] 유진항은 명령을 받들어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온 유진항은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누웠다. 그러자 애첩이 물었다. [어째서 이렇게 기운이 없고 힘들어하시는가요?] [내가 술 마시는 걸 좋아하는 건 임자도 알 것이네. 그런데 술을 못 마신지 너무 오래되다 보니 목이 말라 죽겠구만.] [날이 저물면 술을 구할 수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셔요.] 밤이 되자 첩이 말했다. [제가 술이 있는 집을 알고 있는데, 제가 직접 가지 않으면 살 수가 없어요.] 그녀는 술병을 들고 쓰개치마로 얼굴을 가린 채 집을 나섰다. 유진항은 몰래 첩의 뒤를 따라갔는데, 첩은 동촌의 한 초가집으로 들어가 술을 사오고 있었다. 유진항이 이 술을 맛있게 마시고 다시 사오라고 시키자 첩은 또 그 집에 가서 술을 사 왔다. 유진항이 이번에는 직접 술병을 들고 일어났다. 그러나 첩이 이상하게 여기고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유진항이 대답했다. [이 근처에 사는 아무개가 내 술 친구인데, 이렇게 귀중한 술을 얻었으니 어떻게 혼자만 마실 수 있겠나? 가서 친구와 함께 마시고 오겠네.] 유진항은 집을 나서 술을 팔던 동촌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 집에 들어서니 몇 칸 되지 않는 누추한 집이어서 비바람도 가리기 힘들 지경이었다. 집 안에는 한 선비가 등잔불을 켜고 책을 읽고 있다가, 유진항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해 일어나 맞이했다. [손님께서는 이런 깊은 밤에 무슨 일로 이런 누추한...

[청구야담][12th]이유가 귀신을 쫓아내다(逐邪鬼婦人獲生)

  영의정 이유가 홍문관에 있을 때의 이야기다. 하루는 종묘 담 밖에 있는 순라곡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 때 마침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밀짚모자를 쓰고 도롱이를 입은 사람이 보였다. 두 눈이 횃불 같이 빛나는데 외발로 폴짝폴짝 뛰고 있었다. 이유와 시종들이 그 모습을 보고 이상하게 여기는데, 이유가 갑자기 시종에게 물었다. [지나 오면서 혹시 가마 한 대를 보지 못했느냐?] [못 봤습니다.] 그 사이 외발로 뛰던 이는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이유가 오다가 제생동 입구에서 가마 하나를 만났던 것이 떠올랐기에, 바로 그 뒤를 쫓아 제생동으로 갔다. 마침내 제생동에 있는 어느 집에 도착했는데 그 집은 이유의 먼 친척집이었다. 그 집 며느리가 괴질에 걸려 여러 달이 되어서 사경을 헤매고 있었는데, 그 날은 제생동 친척 집에서 요양하고 있었다. 이유는 말에서 내려 그 집으로 들어가 주인을 만났다. 그리고 자기가 길에서 보았던 것들을 말하고 방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부탁했다. 방에 들어갔더니 조금 전 길에서 만났던 그 귀신이 부인의 머리맡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이유는 아무 말 없이 귀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곧 그 귀신은 밖으로 나가서 마당 한 가운데에 섰다. 이유가 따라나가 또 바라보았더니 귀신은 다시 용마루 위로 올라갔다. 이유가 계속해서 올려다보자 그 귀신은 결국 공중으로 날아가 사라져버렸다. 그러자 아파서 정신도 못 차리고 있던 며느리가 갑자기 정신을 차렸는데, 마치 전혀 아프지 않았던 사람 같았다. 그렇지만 이유가 그 집을 떠나자 며느리는 곧바로 다시 앓아 누웠다. 결국 이유는 종이를 백장 정도 구해서 손수 서명을 하고 방 안 가득히 그 종이를 붙였다. 그러자 드디어 귀신이 물러나고 며느리의 병도 씻은 듯이 나았다고 한다.

[청구야담][11th]네 선비의 관상(會琳宮四儒問相)

  인조 병자년때 초봄에 초시를 치루고, 복시는 나라에 일이 있어서 다음해 봄으로 미뤄졌다. 이 때 초시에 합격한 유생 네 명이 북한산에 모여 같이 공부 모임을 만들고 공부했다. 그런데 하루는 웬 스님이 와서 선비들에게 말했다. [이 곳에 신통하신 큰스님이 계시니 선비님들은 과거 문제와 향후 운세에 관해 여쭤보시지요.] 네 선비가 같이 모여 큰스님에게 물었더니 큰스님이 말했다. [소승은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곳에서 관상에 관해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조용한 방에서 한 분씩 천천히 살펴보고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네 선비가 그 말에 따라서 한 명씩 큰스님의 방에 들어가서 관상을 보고 나왔다. 서로 모여서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 물어보자 한 선비가 말했다. [나는 자손이 천명이 넘을거래!] 다른 선비가 말했다. [나는 도적들의 장수가 될거래!] 또 다른 한 선비가 말했다. [나는 신선이 될거래!] 마지막 선비가 말했다. [나는 과거에 합격해서 반드시 너희 셋을 만날거래!] 네 선비는 각자의 점괘에 한바탕 웃고 떠들며 정신 나간 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난데 없이 그 해 말에 청나라 오랑캐들이 우리나라에 쳐들어 와서 강화도를 함몰시키고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네 선비는 각자 달아나서 목숨만 겨우 건졌는데, 전쟁이 끝난 후에도 만나지 못하고 소식마저 끊겼다. 그 중 한 선비는 정말로 과거에 급제해서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봄에 경상도를 순찰하면서 안동에 도착했는데, 안동에서 떠나려는 와중에 문 밖에 한 손님이 소를 타고 와서 명함을 내밀고 만나기를 청했다. 그렇지만 관찰사는 명함을 받아봐도 그가 누구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들어오게 해서 만나보았더니, 평소 알지 못하던 사람인데 다 떨어진 도포에 망가진 삿갓을 쓴 가난한 선비였다. 인사를 나눈 뒤 천천히 이야기를 해보았더니, 그는 바로 지난날 북한산에서 함께 공부했던 선비 중 한 명이었다. 큰 전쟁이 있은 후 각자 생사도 알지 못하고 살다가 우연히 만나게 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관찰사가 사...

[청구야담][10th]별에 기도하던 세 노인(坐草堂三老禳星)

  옛날 선조 임금 때 1584년 1월에 한양 선비 이생이 강릉에 일이 있어서 가게 되었다. 걸음이 느린 말을 타고 피곤하게 길을 가다 깊숙한 두메 산골에서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 사람은 사람대로 지치고 말은 말대로 피곤한데, 날은 저무는데 머무를 곳이 없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 다행히 숲 속에서 한 목동을 만나게 되어 길을 물었더니, 목동은 언덕 너머를 가르키며 말했다. [이 언덕을 넘어가면 아무개 양반집이 있습니다. 그 곳을 빼면 주변에 사람 사는 곳은 없습니다.] 선비가 목동의 말을 따라 언덕을 넘어갔더니 세칸짜리 초가집 한 채가 있었다. 그 집에 가서 문을 두드리니 어떤 한 노인이 나왔는데, 나이는 60여세 정도였고 머리에는 다 떨어진 모관을 쓰고 있었고 한 소년이 옆에서 노인을 모시고 있었다. 노인이 선비를 반갑게 맞이하며 말했다. [이렇게 깊은 시골에 손님께서 어떻게 오셨습니까?] 선비가 산에 왔다 길을 잃어버린 사정을 설명하자 노인은 그 집에서 묵고 가는 것을 허락했다. 그리고 노인은 조용히 앉아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는데, 무언가 곰곰히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있는 것 같았다. 선비 또한 가볍게 말을 하기 어려운 분위기여서 그냥 방 한 쪽 모퉁이에 앉아 있었다. 잠시 기다리자 시중을 들던 소년이 저녁밥을 차려와서 먹었다. 황혼녘이 되자 노인은 소년에게 말했다. [날이 벌써 저물었는데도 아직까지 오지 않는다니 몹시 이상하구나. 네가 문을 열고 멀리 내다보거라.] 소년이 문을 열고 멀리 바라보더니 말했다. [지금 막 앞 시냇가를 건너 오십니다.] 노인은 눈을 크게 뜨고 선비를 보며 말했다. [부디 입을 다물고 가만히 앉아 계십시오. 옆에서 입을 열어서는 안 됩니다.] 잠시 뒤 두 사람이 왔는데, 한 사람은 평범한 선비였고 다른 한 사람은 스님 옷을 입은 늙은 스님이었다. 방에 들어온 그들은 서로 인사를 나눈 뒤 입을 다물었다. 노인은 소년에게 정화수 한 그릇을 떠오게 해서 소반 위에 올리고 향로에 향을 살랐다. 그 후 세 사람이...